(마태복음2:13~15) " 하나님의 섭리 "
18세기 계몽주의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렸던 데카르트는 이 세상에서 자명하고 확실한 것은 없다 라고 말합니다.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 생각한다는 것은 의심하고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의심하고 비판해 보니 자명하고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의심하고 비판하는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한다면 살아가기 힘들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강을 지나는 다리들과 살고 있는 집과 일하고 있는 사무실의 건물이 무너진다는 의심과 비판을 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인식의 뿌리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가치와 의미를 공감할때 생기는 것입니다.
찬송가 “아 하나님의 은혜” 가사 중 “나는 확실히 아네” 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이 말은 내 속에 생긴 믿음의 결론으로 나는 확실히 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인생이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과의 만남, 두 번째로 환경의 변화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항상 생각하고 계획하며
살아 가지만 우리의 뜻과 생각대로 되어 지지는 않습니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의 뜻과 생각에 관계없이 분명 끌어가는 힘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세상속에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이끄심을 느낄 때 더 큰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잘 만나야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의 변화를 하나님께서 이끌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이끌어 주심을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진정한 신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구약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쓴 말씀입니다. 로마가 집권하는 시대에 헤롯은 로마에게 잘 보여 유대의 왕으로 임명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유대의 왕이 태어 난다 하니 헤롯은 왕의 자리를 빼앗길까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13절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5절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구약(호세아11:1~8)에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호세아서11장 1~7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의 줄로 이끌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 오기 싫어했습니다. 앗수르가 그들의 임금이 되어 그들을 괴롭히지만 끝끝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호세아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일반적인 논리로 7절까지의 말씀을 생각하면 8절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신다는 내용이 나와야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절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며 모든 것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앗수르도, 페르시아도, 헤롯도 모든 사람들과 환경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섭리입니다. 이러한 섭리속에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세력들도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큰 목표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
불 붙듯이 우리를 향하시고 있는 것 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矜 (자랑할 긍) 恤 (불쌍할 휼) 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자랑이 되는 것 입니다.
인간적으로 불쌍함은 안되었다는 의미로 여겨지지만 하나님 안에서 불쌍히 여겨지는 것은 자랑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사람관계에서도 적용하여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을 위해 내가 이러한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고,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 입니다.
(마태복음2:13~15) " 하나님의 섭리 "
18세기 계몽주의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렸던 데카르트는 이 세상에서 자명하고 확실한 것은 없다 라고 말합니다.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 생각한다는 것은 의심하고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의심하고 비판해 보니 자명하고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의심하고 비판하는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한다면 살아가기 힘들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강을 지나는 다리들과 살고 있는 집과 일하고 있는 사무실의 건물이 무너진다는 의심과 비판을 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인식의 뿌리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가치와 의미를 공감할때 생기는 것입니다.
찬송가 “아 하나님의 은혜” 가사 중 “나는 확실히 아네” 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이 말은 내 속에 생긴 믿음의 결론으로 나는 확실히 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인생이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과의 만남, 두 번째로 환경의 변화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항상 생각하고 계획하며
살아 가지만 우리의 뜻과 생각대로 되어 지지는 않습니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의 뜻과 생각에 관계없이 분명 끌어가는 힘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세상속에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이끄심을 느낄 때 더 큰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잘 만나야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의 변화를 하나님께서 이끌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 인생은 내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이끌어 주심을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진정한 신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구약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쓴 말씀입니다. 로마가 집권하는 시대에 헤롯은 로마에게 잘 보여 유대의 왕으로 임명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유대의 왕이 태어 난다 하니 헤롯은 왕의 자리를 빼앗길까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13절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5절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구약(호세아11:1~8)에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호세아서11장 1~7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의 줄로 이끌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 오기 싫어했습니다. 앗수르가 그들의 임금이 되어 그들을 괴롭히지만 끝끝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호세아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일반적인 논리로 7절까지의 말씀을 생각하면 8절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신다는 내용이 나와야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절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며 모든 것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앗수르도, 페르시아도, 헤롯도 모든 사람들과 환경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섭리입니다. 이러한 섭리속에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세력들도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큰 목표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
불 붙듯이 우리를 향하시고 있는 것 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矜 (자랑할 긍) 恤 (불쌍할 휼) 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자랑이 되는 것 입니다.
인간적으로 불쌍함은 안되었다는 의미로 여겨지지만 하나님 안에서 불쌍히 여겨지는 것은 자랑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사람관계에서도 적용하여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을 위해 내가 이러한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고,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 입니다.